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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임팩트코리아(제13화): 내 마음 속의 시애틀 (Seattle On My Mind)

레이 찰스(Ray Charles)의 1960년 1위 히트곡인 “Georgia On My Mind”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나중에 조지아의 공식 주가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노래와 상징에 빗댓다면, 제이슨에 있어서는 “Seattle On My Mind”가 될 듯 하다.

장동선과 조카는 워싱턴DC를 출발해 이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도착했고, 박사장은 뉴욕에서 애틀랜타로 이동중이었는데 비행기에는 제이슨이 길안내이자 길동무로 붙여준 앞으로 애틀랜타 지사장으로 활동할 사람도 함께 하고 있었다.

제이슨은 동부에서 서부로 대륙횡단비행을 하고 있었는데, 몸이나 마음이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워싱턴주 시애틀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시애틀은 제이슨에게 특별한 도시였다. 시애틀로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부터 번져간다.

미국에 대해서 간혹가다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워싱턴DC와 워싱턴 State에 대해서 구별이 안되는 사람도 있는데, 워싱턴DC는 미국 동부에 있는 미국의 수도이고 워싱턴주(State)는 서부에 위치한 별개의 주이다. 미국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워싱턴DC를 DC라고 하거나, 또는 DC라고 하면 자신들의 동부에 있는 수도라고 알아 듣는다. 물론 공식석상 같은 장소에서는 풀네임으로 정확하게 말해주면 오해 없이 명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이번 출장길은 비록 비즈니스 출장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비즈니스 보다는 인간관계 교류의 성격이 강하다. 앞으로 시애틀에 기반을 두고 활동할 신진 변호사 2명과 함께 골프 라운딩을 하기로 스케줄이 잡혀 있다. 물론 골프라는 운동의 특성상 운동중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것이다.

그 변호사들은 한국인들인데, 한명은 이제 막 로스쿨을 졸업해서 소송 업무를 처음 접하게 되는 정말 초짜 중에 초짜이고, 다른 한명도 신진 변호사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소송 케이스를 이미 몇 개 정도 해보고 있는 상태였다.

이 2명의 젊은 친구들은 제이슨이 학부생 때부터 발굴한 인재들로서 로스쿨까지 제이슨이 사실상 이끌었다고 봐도 될 만큼 제이슨의 손때가 묻어있는 인재 중의 인재들이었다. 실력은 기본이고 인성까지도 제이슨이 탐낼만큼 앞으로 미국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할 인재들이다.

로스쿨 학비이며 생활비까지 제이슨이 모두 도움을 주선하고 앞길을 열어주었다. 그 초짜 변호사들도 자신들의 앞길을 열어준 제이슨을 단순히 상사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진심으로 아버지처럼 대할 뿐더러 그렇게 생각까지 했다.

제이슨이 시애틀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사실 이 젊은 변호사 2명 때문은 전혀 아니다.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제이슨을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여.자. & 추.억.

제이슨이 한참 젊었을 때에 시애틀에서 특별한 경험과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은 당시 여자친구와의 추억어린 시간이 자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제이슨은 다른 특별한 스포츠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골프만이 유일하게 그가 직접하는 운동이다. 가끔씩 요트도 타고 하지만은 제이슨에게 있어서 요트는 그냥 사교의 성격이 강하다. 제이슨은 젊은 시절에 남들이 하는 컴퓨터 게임 같은 것도 거의 안했는데, 단 그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컴퓨터 게임은 당시에 유행하던 스타크래프트였다. 그 이후 다른 컴퓨터게임은 하지 않았다. 한 종족만 줄곧 한 것은 아니고 테란, 저그, 프로토스의 3종족 모두를 번갈아 가면서 운용했다.

제이슨이 골프를 사랑하는 이유는 남들과 비슷한 이유도 포함하겠지만, 골프라는 스포츠의 특성 그 자체를 좋아했고 그것이 제이슨의 취향이나 성향과 맞아 떨어지는 운동이었고 무엇보다 그냥 골프 그 자체를 사랑했다. 사람마다 체질인 운동이 있다고 한다면, 골프야말로 제이슨의 체질이었다.

골프장에 나가면 자연을 즐기며 잔디 위에서 좋은 공기 마시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사업이나 영업상 좋은 도움을 주기 때문에 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에서는 프로스포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중들이 스포츠바나 식당에서도 대형 TV나 스크린을 통해서 각종 프로스포츠를 보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제이슨은 사실 그런 스포츠 보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다. 프로골프 경기마저 잘 보지 않았는데, 사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물론 유명선수들이 다수 참가하는 화제의 대형경기는 사무실에서 가끔씩 볼 때도 있었고, 그 보다 더 큰 경기는 실제 갤러리로 참여한 적도 있다.

제이슨이 젊은 이 친구들을 키우려고 하는 배경에는 여러가지 이유와 용도가 있었다.

일단 변호사 업무측면으로서는, 자신이 그동안 갈고 닦은 소송 실력과 경험을 그들 젊은 변호사들에게 깊이있게 전수해주어서, legal battle에서 앞으로 종횡무진 활약할 수 있는 gladiator를 조련해보고 싶은 승부사적 기질의 발현이다.

제이슨 본인이 로마 검투사를 다루는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미국 법정에서 미국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 앞에서 온갖 지식과 기술을 동원해서 그들을 설득해내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법률 검투사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럴 자격과 실력, 그리고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비변호사 업무 측면으로는, 그들을 단순히 법률전문가 머무는 것이 아닌, 차세대 리더로서 미국 사회에 우뚝서게 자리잡도록 코치를 하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 제이슨은 젊은 시절에 혼자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돌고 돌아서 시간 낭비가 많았다고 아쉬워 하는 측면이 많았다.

젊은 좋은 인재들을 발굴해 처음부터 성장해나갈 방향과 자세를 잡아준다면, 자신과 같은 기성세대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이유가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두 친구들이 장차 미국 정치판에서 현재 아시아인의 한계상 대권(大權)을 잡는 당사자는 되지 못할 지라도, 그런 대권을 거머쥔 자의 오른팔, 왼팔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본인들을 위해서, 제이슨을 위해서, 미국을 위해서, 그리고 한국을 위해서. 그리고 인류사회와 그 미래를 위해서…

시애틀에서는 이 두 젊은 친구들을 심어두려고 하지만, 미국 각 권역별로 앞으로 비슷하게 그런 체제를 구축할 예정이었다. 이미 상당수는 구축해 두었기도 하고.

이런 인재육성 사업은 제이슨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의 전체모습이 결코 아니다. 그 하위 요소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미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미국내 백인들의 성향이나 행태를 제이슨한테 물어볼 때마다, 제이슨이 한결같이 하는 대답이 있다.

“All white people are not created equal.”

미국독립선언서에 나오는 한 문구를 빌려와 농반진반으로 빗대서 하는 표현이었지만은, 그만큼 백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백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희멀그래한 피부색을 가진 백인들일지라도, 그 사람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종족이 무엇인지, 미국에 언제 왔는지, 사회경제적 배경은 무엇인지, 직업적 특성은 무엇인지, 집안내력이 어떻게 되는지, 집안이 정착한 지역이 어디인지, 본인이 태어나 자란 지역은 무엇인지, 교육적 수준과 배경은 무엇인지, 재정적 형편과 여력은 어떤지에 따라서, 그야말로 천차만별(千差萬別)이요 백인백색(百人百色 & 白人百色)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기준이나 항목에 따라서, 어떤 큰 흐름에 부합하는 차별점은 백인 그룹별로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해서 항상 이런 그룹은 이럴 것이다고 단정해서도 안된다.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이슨은 미국 전체를 비교적 골고루 겪어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했었다. 동부, 서부, 중서부, 남부 등에서 모두 몇년씩 일부러 살아보기도 했다.

현재 제이슨은 전체 비즈니스 기반을 뉴욕으로 하고 있다. 서부권역의 비즈니스를 위해서 오래전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사무소를 이미 오픈해서 운영해오고 있다. 중서부권 비즈니스를 위해서 일리노이 시카고 지사가 있다. 남부권에는 텍사스 댈러스와 휴스턴에 동부나 서부보다는 작은 규모의 지점이 있고, 플로리다에는 뉴욕에서 부자들이 많이 건너갔기 때문에 그들에 특화된 부티크 지점이 있다.

동남부 권역에 대해 활동강화를 위해서 이번에 특별히 조지아주 애틀랜타 지사 프로젝트를 가동했는데, 향후 지역활동을 위해 지사장을 파견해서 그 준비작업을 지시했고 박사장이나 장동선 특파원 같은 경우도 경험삼아 개인적으로 둘러보라고 언급한바 있어서, 그들이 애틀랜타로 간 것이었다.

각 지역마다 보편성과 특이성이 모두 존재했다. ‘거기서 거기’라는 한국말대로, 대부분의 도시들이 대동소이하게 사람사는 곳이나,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곳은, 보편적인 어떤 성질이 있다. 특이성으로 따지면, 그래도 각 지역의 다른 분위기라는 것도 존재했다. 그 지역마다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특성이 알게 모르게 반영되는 것이다.

제이슨은 각 지역의 특성을 모두 존중한다. 또는 최대한 존중하도록 노력한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말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제이슨에게도 팔이 안으로 굽는 지역이 있었는데, 워싱턴주와 미네소타주였다.

그것은 이유가 다 있었다. 공통점은 2가지였는데 하나는 인간관계의 경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으로 북유럽계통, 즉 스칸디나반도 출신 또는 그 인접지역 출신의 이민자 후손들이 비교적 많은 지역이라는 점이다. 제이슨 개인적 차원으로는 그 공통점 2가지에 대해 공통점, 공통분모마저 존재했는데, 그것은 여.자.(女子).

백인들을 유럽계로 좁혀 보더라도 다 같지가 않다. 전통의 서유럽계. 서유럽계보다 더 늦게 이민온 남유럽계.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던 동유럽계. 모두 종족적 특성이나 기질이 달랐다. 서유럽계 중에서도 영국계와 독일계, 일부 프랑스의 강세가 강했는데, 알다시피 미국은 영국이 북미 식민지 쟁탈전에서 최종 승리자였기 때문에 국가의 기본 세팅값을 영국식으로 해버린 것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북미국가가 법률과 언어, 정치와 문화, 사회적 기본 값들이 영국 스탠더드로 자리잡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제이슨은 두루두루 경험해보고, 북유럽계 사람들이나 그 후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제이슨의 출신 기반인 한국이나 동북아시아, 아시아권 보다도 북유럽계 사람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는 것을 더 편안하게 느끼고 더 좋아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 개인적 견해, 주관적 경험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제이슨은 인간관계 교류가 시작돼서 조금만이라도 친해지면, 미국 사람들과 교류하는 경우에 조상들이 어디서 왔는가 거의 항상 물어보는데, 만약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 이런 지역에서 온 경우에는 통상의 대화보다 더 물어보는 것도 이것저것 되고 대화가 다소 더 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 이유를 따지자면 사실 본인의 젊은 시절의 경험의 소산이다.

(제14화에서 이어집니다.)

[집필] 코리아베스트 편집부
www.koreabest.org

작성일: 2024년 4월 12일 목요일.